고담 노중평 (역사천문학회 회장, 상고연구가, 민속연구가)

인천사람 김정숙

황해도 굿의 명무로 알려진 김정숙 선생을 인터뷰하기 위해 김선생 신당을 찾았다. 김선생이 직접 대문을 열어주어 함께 거실로 들어갔다. " 혼자 살면 돈 벌 것 없다."는 김선생의 말을 시작으로 하여 무교와 관련한 대화를 시작 했다. 황해도 무당들 중에서 구대인 만신들이 연세가 많아 다 돌아가시고 연조 있고 이름 있는 몇 분을 빼면 김정숙 만신이 그 다음 차지인데, 그분들보다 훨씬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어린 나이에 무업세계에 입문하여, 지금은 아무도 무시하지 못 할 구대인에 속하는 원로가 되었다. 실력이 출중해서 굿 12거리는 물론이고 팔도 굿중 어느 하나 빠지는 굿이 없이 잘한다. 아무래도 굿 하며 살도록 타고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민속예술축제에 해주본영대동굿으로 참가해서 문화관광부 장관상과 개인 연기상을 수상을 하였는데 무당으로서의 찾아보기 힘든 귀한 기록의 보유자가 아닌가 싶다.

언젠가 어느 굿당에서 김선생이 하는 굿을 보았는데, 청이면 청, 장구면 장구, 사설이면 사설, 춤이면 춤, 어느 하나 나무랄 곳이 없었다. 광장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듯 , 사설이 현란하고 깊이가 있어서 사설에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생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학자들이 그런 실력을 알고 있었어도 그의 굿 인생을 제대로 조명해 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회 활동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흙에 묻힌 진주와 다름이 없다. "세월 따라 시대가 가고 세대교체가 자연히 되니까 그 때, 좋은 시절이 반드시 올겁니다."하고 나를 김선생에게 안내한 장영호 대표는 말한다. 굿에 살고 굿에 죽는 인생이 무당이라, 무당이 된 사람은 항시 죽음을 벗하며 산다. 선생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허공에 분골을 날려 보내는 것아 가장 무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훌륭한 무당이 죽어서 허공성수라도 되려면 몸을 태워 뼈를 가루로 만들어 허공에 휘날려야만 그 안에서 단 하나의 쿼크가 나와 자유스럽게 어느 몸에 몸주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장을 선호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옛 신라국과 가야국 땅에 많은 대형 고분을 조성 했지만 지금에 와서 왕후장상의 살과 뼈가 모두 다 흙으로 돌아가,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설사 왕릉에 묻힌다고 한들, 오늘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신뿌리를 타고난 무당

김선생 부모님의 고향은 북한의 진남포라, 6.25사변 때 남부여대 하여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아버지는 배를 타는 일을 생업으로 하였다. 김 선생은 인천 용현동에서 태어났고 이후 인천에서 성장했다. 일곱 살 되던 때에 ,용중학교를 짓는다고 포도밭과 배밭을 불도저로 밀었다. 불도저가 지나가면 흙이 뒤집어졌다. 흙이 뒤집어져서 방울과 부채가 나와 캐어가지고 들어오니까, 동네에 사는 신장 할머니가(무당은 못되고 빌어 주는 일만 하는 사람) 그를 보고 "정숙이는 무당이 되려나봐"라고 말하였다. 옆집에 사는 만신도 "신이 오려나 봐" 고 말하였다. 밤에는 무서워 화장실에 가지 못하였다. 몸이 아팠는데 , 보건소에서 콜레라가 돈다고 새끼줄을 치고 사람들 출입을 금지시켰다. 몸이 아픈 사람들을 차에 실어 갔으나 김선생은 용케 차에 실려 가지 않았다. 그 때는 몸이 아픈 것이 무슨 병인지 알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을 하면 신병을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엔 사람들은 굿을 많이 하였다. 주변에 무당이 많이 살아서, 볼 수 있는 것이 굿이라, 친구들과 굿 장난을 하고 놀았다.

친구 네 명이 함께 냄비 뚜껑을 가지고 제금을 쳐서 쨍강쨍강 소리를 내고, 병마개를 가지고 방울을 흔들어 짤랑짤랑 소리를 내고 , 솜방방이로 군용 물 초롱을 쳐서 펑펑 소리를 내며놀았다. 놀고 나서는 놀이기구를 광에 있는 항아리 속에 널어 두었다가 친구들이 오면 꺼내 놀았다. 또 놋으로 만든 세숫대야를 엎어놓고 치며 놀았다, 후에 이들 모두 무당이 되었으나 잘 살지 못하였다. 9시 전에 학교 가서 공부하다가 신병으로 쓰러져 넘어지면 오빠가 업고 집에 오곤 하였다. 병치레를 하느라고 겨우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9살에 또 방울을 캐왔다. 몸이 여전히 아팠다. 전도관에 나가는 할머니가 교회에 나가면 고친다고 하여, 어머니가 병을 고쳐야 하겠다고 교회에 데리고 갔다. 그러자 어머니가 피를 쏟았다. 무꾸리를 하니,"너희 집에 무당 될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무당이 되어야 하는데 , 교회로 데리고 갔으니 신에게서 벌을 받은 것이다.

굿을 하였더니 아픈 것이 나았다. 그해 8월 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동네로 이사 온 백만자 만신에게 물었더니 "무당이 내린다"고 하였다. 김용해 만신에게 물었더니 병굿을 하라고 하여 ,병굿을 했는데 돌연 굿을 중지해야 했다. 이유는 병굿은 고사하고 내림굿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당이 어머니에게 세수를 시키라 하여 세수를 했더니, 손뼉을 치고 몸이 떨렸다. 3개월을 누워 있었고 ,너무 오래 굶어서 몸이 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용해 만신이 쾌자를 입히고 자락을 허리에 묶어 주니, 물 초롱 위에 올라서 춤을 추며 난리 법석을 피웠다. 만신과 어머니가 의논하더니 내림굿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서워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면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해야 하였다. 당시에 배다리 근처 오성 극장 쪽에 만물상이 있었고, 싸리재에 인천 만물이 있었는데 , 거기에서 명두와 부채를 사다가 신내림을 받았다. 할머니의 신명이 오셨다. 이리하여 김용해 만신이 신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방울과 부채를 집에 가져 갈 수 없어서 신어머니가 가져가기로 하였다. 방울과 부채를 가져간 신어머니 집에서는 가족이 모두 병이 나 눕고 말았다. 신어머니는 모셔오지 말았어야 할 신을 모셔와 그렇게 되었다고 후회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신물들을 신어머니 집에서 신딸 집으로 보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김선생 아버지에게 전후 사정을 알렸으나 ,아버지는 허락할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그렇다고 허락을 아니 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굿 해준 무당이 누구냐고 물었다. 집에 오신 아버지는 언니를 앞장 세우고 신어머니네 집으로 갔다. 신어머니에게 다짐을 받고 딸을 내줄 생각이었다.

"큰 무당이 되겠느냐"고 신어머니에게 묻고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다. 신어머니는 큰 무당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또 "책임을 지겠느냐?"고 물었다. 신어머니는 책임을 지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신어머니에게 맡겼다. 그래서 김선생은 신어머니 집으로 가게 되었다. 14세 때 첫 작두를 탔다. 애기 만신이 작두를 탄다고 인근에서 화제가 되었다. 형부가 작두를 잡았다. 울음밭이 되었다.

황해도굿의 산증인

무당이 돈 후로 5,60대 만신들을 따라다니며 , 그들이 하는 굿을 눈에 익히고 귀에 익혀가며 공부하였다. 고생을 많이 했다. 인천 만신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고생이었다. 인천의 모든 무당과 함께 굿을 하였고, 대한민국 각 도의 무당들과도 함께 굿을 하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굿을 하였으므로 어느 굿을 해도 굿에는 막힘이 없었다. 섬이란 섬은 아니 간 곳이 없고 육지 굿도 많이 했다. 덕적도와 같은 섬에 가면 일기가 불순할 때는 배가 묶이게 되는데 , 열흘씩 못나와 고생을 하게 됐다.

김선생은 굿을 집에서 하였다. 당시에 애기 만신은 김선생 혼자였다. 그래서 모든 무당이 다 데리고 다니려고 하였다. 그 때는 집 대청에서 굿을 하였다. 겨울엔 추워서 털 바지를 입고 굿을 했다. 먹지 못해서 몸이 말랐고 힘이 들었다. 다음 굿엔 안데리고 가겠지 하고 기대를 하고 있으면 무슨 조화 속인지 꼭 데리고 갔다. 고생스러워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가 굿에 가면 재가집에서 별비만을 주지 않고 우수리를 얹어서 채워 주었다. 동네 남자들이 술 따라 달라고 하면 자존심을 세우고 이불에 숨고 울었다. 신어머니가 "술 따르고 무감을 세워야한다"고 달랬다. "복주고 명 주러 왔지 왜 술까지 따라요 "하고 항의하면 "이 집이 덕을 못 보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꾹 참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이 상해 있어 무얼 먹으면 체하고 토했다. 그래서 아예 긂고서 굿을 하였다. 성질을 죽이고 굿을 하자니 가슴앓이가 생겼다. 지금도 가슴앓이가 일어나면 꼼짝하지 못한다.

"지금은 팔자 사나운 사람이 없다. 편하게 밥 먹고..." 그가 웃으며 말한다, 김선생은 흉내를 잘 내어, 굿 갔다 오면 신어머니 앞에서 일일이 다 흉내를 내었다. 김선생은 간간이 신어머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신어머니는 한문을 할 줄 알아 정감록을 이해한 유식한 만신이었다. "2000년이 되면 보통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언젠가는 나라 심판 ,물 심판, 불 심판이 있을 것이고 ..."하는 이야기는 어려서 신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신어머니는 "정숙이는 큰 사람이 될게야.... 우리나라에 정씨 대통령이 나와야 잘 산다!"는 말도 하였다. 신어머니를 만난 지 6년 후에 석바위 박선옥 만신을 만났다. 만난 동기는 1월11일 영흥대동굿을 하기 위해서 젊은 만신을 데리고 오라 하여 간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 후 12년을 제2의 신어머니로 석바위 만신을 모셨다. 당시에 석바위 만신의 나이가 46세였고 신어머니는 석바위 만신보다 10살이 위였다. 김선생의 나이가 23세 때였다. 정숙이 만신이 굿 잘하고 장구 잘 치니 데리고 가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데리고 가려면 신어머니의 승낙을 받아내야 하였다. 신어머니에게 석바위 만신이 승낙 받으러 왔다. 당시엔 신어머니,둑실 굿당 장사장 엄마, 명자 엄마등이 같이 다녔는데 이들에겐 신딸이 많았다. "나는 신딸이 없어요, 장구무당 굿무당 한 명 주세요." 신딸을 한 명 달 라고 하였다. 신어머니가 " 못 데리고 간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서 굿이 난다 해도, 신딸 한 명 빠진다고 굿에 지장이 주지는 않았다. 결국 신어머니가 김선생을 석바위 만신에게 내주어 영흥에 들어가서 굿을 하게 되었다. 정월 11일 부터 5일 동안 굿하기로 하고 섬에 들어갔는데 날씨 때문에 섬에 갇혀 29일에야 나오게 되었다. 나올 때는 쌀이고 뭐고 바리바리 싣고 왔다. 그 후로 석바위 만신의 일이 있으면 함께 다녔다. 김선생에게 굿이 나서 굿을 할 때면, 꼭 신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 신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석바위 만신과 함께 다녔다. 두 분을 같은 신어머니로 대접했던 것이다. 석바위 만신은 갱구지 사람을 신딸로 데리고 다녔다. 김선생은 석바위 만신이 가는데는 다 따라다녔다. 황해도 면민회에도 따라갔다.

세월이 좋아지면서 두 사람은 함께 공연도 많이 하였다. 한사람이 없으면 죽는 줄 알았다. 김선생이 굿을 할 때는 석바위 만신을 경관으로 앉혔다. 석바위 만신과는 13년을 함께 살았다. 인천 한진 아파트가 들어선 솔밭 동네에서 살았다. 굿을 할 때는 집에서 하였다. 석바위 만신은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일찍 세상을 떠난 김용애 만신을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석바위 만신은 안다. 그녀가 돌아가실 때까지 왕래하였다. 석바위 만신은 신아버지인 김재만,이기백 두 분의 굿만을 배웠으므로 다른 분의 굿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김선생은 전국을 돌며 굿을 폭넓게 배우고 알리면서 다녔다. 김성생은 말한다. 굿은 예술이라고, 예술은 지속적인 공부와 연마를 필요로 합니다. 하루라도 쉬면 표가 나는 것이 예술이다. 김선생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학습을 계속했다. 집집마다 문서가 다르므로 학습을 따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선배 만신은 그에 대하여 다름과 같은 말을 하였다. "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조화를 잘한다. 누구는 무엇만을 잘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초월한다." 구대 만신들이 하나둘 작고하거나 은퇴하는 시점에 황해도굿의 산 증인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 갈 큰 무당 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황해도 굿을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선두주자로서 김선생이 주목 받을 날은 머지않아 필연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